3·8민주의거

3·8민주의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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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민주의거
[의의]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부터 3월 10일까지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 불법적 인권유린에 대항하여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민주와 자유, 정의를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다. 3·8민주의거는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역사적 교훈과 가치가 큰 것이며 대구의 2·28, 마산의 3·15와 함께 4·19혁명의 단초로서 중대한 의의를 새길 수 있는 것이다.

[경과]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 대전시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야당부통령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와 때를 맞추어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대전고등학교 1,000여 명의 학생이 독재타도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시민들의 환호 속에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본래 대전시내 고교생들이 연대하여 시위에 참가하기로 하였지만 사전 발각되어 경찰의 극심한 저지를 받는 가운데 보문고등학교는 3월 9일부터, 대전공업고등학교는 3월 10일부터의 학기말시험(당시는 4월에 새학기 시작)으로 시위를 봉쇄했으며 9일에는 또 경찰에서 대전고, 대전상고, 대전공고, 보문고 등 4개 학교 학생대표 24명을 연행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일에는 다시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 명이 자유당의 그릇된 정부통령 선거전략을 규탄하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열렬한 시위를 감행했다. 대전여고, 대전사범학교, 호수돈여고 등은 경찰 감시 하에 교외진출이 저지되었다. 이 과정을 통합하여 3·8민주의거로 규정하였다.

시위가 진행되면서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 구속되어 고초를 당했으며 수많은 학생이 총개머리판과 방망이로 얻어맞았고 교복, 교모, 신발, 소지품 등 잃어버린 물건이 수없이 많았다. 또한 논바닥에 가두어 놓은 인분통에 빠지고 넘어져 곤경에 처하거나 상처가 난 경우도 허다했다. 한 달 이상을 피신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도 있었고, 부상으로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는 학생도 많았다. 특히 두명의 교사(대전고 조남호, 금종철)가 수갑을 차고 곤봉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연행되는 애끓는 장면이 있었는가 하면 경찰 방망이로 맞아 고막이 터지고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처절한 인생(대전고 송병준)도 있다.

당시의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 동아, 조선, 한국, 대전, 중도일보 및 서울신문 등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2000년부터 시작한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의 각종 간행물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마침내 2009년 10월 9일, 대전광역시, 「3·8민주의거」기념일 제정 조례가 공포되었고 2013년 4월 29일, 3·8대전민주의거의 민주화운동 인정 근거마련을 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5월 22일 정부에서 개정 공포하였다. 2017년 12월 1일에는 3·8민주의거기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18년 11월 2일, 3·8민주의거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공포했다(대통령령 29271호). 이로써 3·8민주의거는 2·28대구민주운동, 3·15의거, 4·19혁명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민주화 운동의 반열에 3·8민주의거의 명실상부한 이름을 높이 올리게 된 우리 기념사업회는 대전충청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표적인 기념사업을 전개하며 대전충청의 위상을 높이고 선양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다.